인증서·매뉴얼보다 중요한 것은 현장에서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가
“아침에 출근한 사람이 저녁에 무사히 퇴근하는 것” 안전관리의 목적
지난달에는 함부로 손대기 어려운 ‘터줏대감’ 위험성평가 이야기를 했다.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넓혀 회사 규모에 따라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이 얼마나 다른 온도로 끓고 있는지 이야기해 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작은 회사는 미지근하고, 큰 회사는 지나치게 뜨겁거나 스스로 충분히 뜨겁다고 믿는다.
■ 101번째 접수번호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다. 무명의 젊은 학자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 논문을 들고 ‘세상에 없던 논문’이라며 한달음에 접수처로 달려갔다. 접수 직원은 고개도 들지 않고 “거기 올려 두세요” 하더니 접수 도장을 찍었다. “101번째입니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논문이 실린 뒤 학계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아 그가 크게 실망했다는 이야기는 누이의 회고록에도 남아 있다고 한다. 세상을 바꿀 원고도 처음에는 서류 더미 속 한 부였던 셈이다.
■ 테이블 구석도 내 차지가 아니었다
컨설턴트로 배정받아 찾아간 곳은 직원 열댓 명의 작은 제조업체였다. “귀사의 안전보건관리체계를 제대로 세워 드리러 왔습니다.” 준비한 인사말을 품고 문을 열었는데, 사무실 큰 테이블 위에는 먼저 다녀간 기관들의 파일철과 법령 포스터, 소화기 표지 스티커, 각종 안내 책자가 이미 빼곡히 쌓여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내가 고민 끝에 만들어 두고 간 서류철도 다음 방문 때면 찾기조차 힘들다. 사장은 겸연쩍은 얼굴로 말한다. “좋은 자료를 다들 많이 주고 가시는데, 볼 틈이 없어서요.” 그 순간 알았다. 아, 나도 결국은 101번째구나.
안전보건관리담당자 선임 의무조차 없는 20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사장을 비롯한 고작 한두 명이 영업도 하고 납기도 맞추고 안전도 챙긴다. 지원사업은 해마다 늘었지만 받아든 서류를 펼쳐 볼 사람은 늘지 않았다. 체계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받아 두는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 인증서 두 장이면 안심도 두 배일까
대기업은 사정이 다르다. 사람도 있고 예산도 있다. 그런데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일부 회사는 과잉 대응의 길로 들어섰다.
ISO 45001뿐 아니라 성격이 비슷한 인증을 하나 더 얹어 나란히 걸어 둔 곳도 봤다. 보험을 두 개 들면 마음은 든든하겠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절반으로 줄까. 심사철마다 현장은 작업보다 인증서류 준비에 바쁘고, 보고서가 두꺼워질수록 담당자의 목소리는 묻힌다.
■ 높은 성벽, 낮은 틈
안전보건관리체계 수준이 꽤 높은 회사는 오히려 다른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같은 내부 인원이 같은 양식으로 해마다 같은 방식으로 점검하다 보니 익숙한 눈이 익숙한 위험을 지나친다.
어느 정도 수준을 갖추고 있으니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한 대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 믿기 쉽다. 그러나 거창하고 완벽해 보이는 매뉴얼과 시스템도 ‘사고 대비’ 측면에서 깊숙이 들여다보면 의외로 구멍이 많다. 성벽은 높아도 틈은 늘 낮은 곳에 있다.
■ 세 부류에 드리는 처방전
작은 회사의 처방은 테이블 정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안전을 맡을 사람도, 위험요인을 고칠 손도 부족하니 열쇠는 결국 대표가 쥐고 있다. 그런데 무재해 달력이 몇 해째 넘어가면 대표의 관심은 식고 “우리는 괜찮다”는 믿음만 두꺼워진다. 그것이 실력 덕인지 운 덕인지는 아무도 모르는데 말이다.
그래서 컨설턴트는 파일철 대신 질문 하나를 들고 가야 한다. “사장님, 올해 ‘큰일 날 뻔했다’는 말을 몇 번 들으셨습니까?” 그 대답을 따라 공장을 함께 돌며 가장 위험한 작업 하나부터 고치고, 손이 모자라면 지원사업 같은 바깥의 손을 빌리면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도 대표의 관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대기업은 두 부류 모두 처방이 같다. 큰 회사는 안전보건 전담조직이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의 요구사항을 빠짐없이 매뉴얼과 체크리스트에 담아낸다. 문제는 그 매뉴얼이 내려가는 길의 끝이다. 말단 담당자는 자기 현장의 여건과 특성에 맞게 ‘현지화’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내려오는 대로’ 관리하기에 급급하다. 본사에서 맞춘 양복을 치수도 재지 않고 모든 사업장에 입히는 격이다.
외부 전문가의 낯선 눈을 빌리되 점검하고 철해 두는 데서 멈추지 말고, 현장 의견을 실제로 ‘반영’할 시간과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현장의 목소리를 챙긴다는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 순번이 아니라 내용이다
101번째로 접수됐다는 그 논문은 결국 물리학을 바꿨다. 안전보건관리체계도 마찬가지다. 몇 번째 컨설팅인지, 인증서가 몇 장인지, 매뉴얼이 얼마나 완벽한지보다 현장에서 실제로 무엇이 바뀌었는지가 중요하다. 규모는 달라도 목적지는 같다.
아침에 출근한 사람이 저녁에 무사히 퇴근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테이블에 101번째 파일철을 올려놓는다. 다만 구석으로 밀려나더라도 한 장만큼은 꼭 읽히는 101번째가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