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故事成語) 중 거경지신(巨卿之信)이라는 말이 있다. 풀이하면 ‘굳은 약속’을 말한다. 남북조시대 범식(范式)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자는 거경(巨卿)이고, 산양(山陽) 금향(金鄕) 사람이었다. 일명 범(范)이라고도 불리었다.
그는 태학(太學)에서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곳에서 여남(汝南) 출신 장소(張劭)와 친구가 되었다. 장소의 자는 원백(元伯)이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약속한다. 범식이 장소에게 말했다. “2년 후에 자네 고향에 가서 양친을 만나 뵙고 자네를 보겠네” 그리고 기일을 약속했다.
약속한 날이 다가오자 장소는 어머니에게 친구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말했다. “2년간 천 리나 먼 곳에 떨어져 있었는데 어찌 약속을 지킬 수 있겠느냐?” 그러자 장소가 말했다. “거경은 신의가 있는 선비입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킬 것입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음식과 술을 준비해야지.”
그날이 되자 거경이 약속대로 도착했다. 그는 먼저 당에 올라 원백의 부모에게 절을 하고 난 후 장소와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이 고사성어처럼 약속(約束)은 지켜야 의미가 있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은 안 하는 것보다 못하다. 우리는 일상에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을 수없이 봐 왔다. 특히 정치인들이 대표적이다. 그러고도 뻔뻔한 모습을 보면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이 고사성어는 약속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2년 전에 한 약속을 지키는 것은 어렵고 힘들다. 우리 사회 현실을 들여다보면 더욱 그렇다.
산업통상자원부 김정관 장관이 최근 포항을 방문했다. 포항은 최근 철강산업 위기 선제 대응 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관심을 받는 곳이다. 김 장관은 철강 CEO들 앞에서 적지 않은 정책 지원을 약속했다. 이 정책들이 미국의 고율 관세로 상심(傷心)이 큰 철강업계에 도움이 될지는 아직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먹지 않아도 배부름을 느끼는 것은 밥상이 풍성하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앞으로의 철강산업이 아름답게 그려진다. 마치 메마른 황무지에 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것과 같이 희망적이다. 절망 끝에서 지푸라기를 잡은 심정이 된다.
김 장관이 CEO 앞에서의 일성(一聲)은 이렇다. “대미(對美) 관세 협상에서 철강 관세 면제를 강하게 요구하였으나 관철이 어려웠던 점에 대한 업계의 이해를 당부드리며, 미국 측과 관세 완화 협의를 지속하고 관세 후속 지원대책 이행, 우회 덤핑 등 불공정 수입재 방어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겠다. 아울러 철강기업, 금융권, 정책금융기관이 함께 하여 약 4천억원 지원 효과를 낼 수 있는 ‘철강 수출공급망 강화 보증상품’을 신설하겠다”면서 “철강산업의 AI 접목을 통한 효율성과 산업안전 강화를 지원하고, 저탄소 철강재 및 특수탄소강에 대한 인센티브 등 저탄소·고부가 전환 지원을 지속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선물은 보따리만 풀어놓았지 아직 알맹이 있는 정책은 구체화되지 못하고 있다. 김 장관이 천명한 정부의 약속은 지켜져야 알찬 선물이 될 수 있다. 위기에 처한 철강산업이 소생(蘇生)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정책 지원 없이는 불가능하다. 고사성어 거경지신(巨卿之信)처럼 정부의 약속은 지켜져야 하고, 지켜야 할 당위성이 있다.
지금 산업부는 철강산업의 위기에 대응하고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지난 1월 출범한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태스크포스(TF)’ 등을 통해 전문가·업계와 정책 과제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TF 논의 결과와 관계 부처 협의를 종합해 철강기업들의 글로벌 공급과잉 대응 노력 지원, 불공정 수입재 대응, 저탄소·고부가 전환, 안전관리와 상생 협력 강화 등의 내용을 담은 ‘철강산업 고도화 방안’을 10월에 발표할 예정이다.
이 방안이 오랫동안 뜸을 들이고 있는 것은 신중함 때문일 것이다. 그 결과에 우리 업계의 명운(命運)이 걸렸다. 산고(産苦) 뒤 태어날 ‘옥동자’가 철강산업을 살릴 귀한 아이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드시 그래야 철강산업이 살고 국가가 산다.
